본문 바로가기

나는 크리스챤/나의 신앙 이야기

[선교 간증] 장흥,


먼저 간증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선교 다녀와서 은혜를 금방 까먹고 내가 선교를 다녀왔나? 싶을 정도로 일상에 적응 중이었어요. 선교 간증 하라고 처음 들었을 때 뜨악 했던 것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해서였는데, 이번 간증을 하려고 정리해보니 정말 이번 선교에 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컸는지, 처음에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웠어요. 부족한 저를 통해 은혜를 나누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1. 선교 대원과 물질, 모든 선교할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주시는 주님

17명의 선교대원, 150만원의 물질을 채워주신 은혜. 숫자를 강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마땅히 필요한 사람을 사역의 규모에 맞게 채워서 보내주신 것이 은혜였습니다. 17명 굉장히 많은 숫자였는데,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으며 어르신, 어린이, 청소년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작년에 구제역으로 팀이 조인되어서 19명이 갔었는데, 그 때 선교대원이 많이 필요한 교회임을 알고 적정 선교대원 15명을 적었었거든요. 처음엔 사람이 많아서 나누었던 어린이, 청소년 사역이었는데 청소년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선배, 멘토의 역할을 해 줄 청년들의 사역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번에도 많은 숫자의 선교대원이 가서 풍성하게 사역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선교 헌금은 1주일 전 주일까지 후원금이 거의 0원이었던 것 같아요. 18일에 처음으로 후원 계좌를 얘기하고, 사역 계획을 나누고 후원 부탁을 하였어요. 팀 주제 말씀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였는데, 괜히 은과 금이 없어도 괜찮다고 선포했나 후회도 했어요. 선교를 가기 전에 저희는 마이너스 17만원으로 시작했고, 마을 어르신, 청소년, 어린이 사역을 모두 커버하기 위해서 120만원의 예산이 필요했어요. 하루 하루 10만원, 20만원씩 채워지더니 선교를 다녀오고 나서 정리해보니 150만원 이상의 선교 후원금이 채워졌던 은혜. 쓸 것 만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섭리. 제가 원래 선교에는 아끼지 말자, 대책없이 막 쓰는 스타일인데 아마 하나님께서 이런 제 성격을 다듬기 위해 처음부터 부족한 상태로 시작해서 꼭 필요한 선교 물품만 사고 집에서 풍선, 풍선 펌프, 사인펜 등을 가져와 될 수 있으면 아끼자로 얘기하면서 선교를 준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2. 선교 가기 전에 장흥서부교회 청소년들과 종로 번개

선교 가기 전에 사역 준비를 위해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는데, 그 날 아침에 서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교회 청소년 아이들과 수련회를 서울 나들이로 오셨다고 하더라고요. 선교 팀모임을 하는 주였는데, 선교팀과 함께 만나도 좋냐고 여쭈어보고 시간 되는 사람들 모두 모여 서울 번개를 하였어요. 나들이 장소도 종로 쪽이었기 때문에 부담 없이 만나러 갔고, 아이들과 장흥에 없는 미스터 피자를 먹으며 선교 전에 교제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어요. 번호도 주고받고, 카카오톡을 하면서 조금 더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아이들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 처음에 다가가기 어려웠는데, 마음 문 여는데 시간이 단축되었어요.
 카톡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기도회 참석과 오전에 어르신 사역에 함께 하자고 제의를 하였는데 또 흔쾌히 오케이를 해서 화, , 목 사역 동안 아이들이 오전 사역을 함께 했습니다. 아이들도 교회의 일꾼으로 성장하기 바라는 마음에 비젼을 세웠는데, 마을 사역을 함께 하고 축호전도를 하면서 분명히 보고 배우는 것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 때 종로 번개를 한 것을 놓고 아이들이 하나님이 자기를 참 많이 사랑하시나보다.”를 깨닫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목사님이 우리 부담될까봐 일부러 아무에게도 말 안하고 가셨는데, 우리 선교팀 말고도 다른 주변 분들이 점심, 저녁으로 만나면서 시간을 가졌는데.. 사랑을 참 많이 받았구나를 느끼고 돌아갔다고 해서 참 감사했어요
 사모님과 목사님을 미리 만나 이야기를 하는 자리는 전화 10번을 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보다 훨씬 깊이 있고 분명하였습니다. 사모님께서 예전부터 하고 싶으셨던 영정사진 사역을 만난 자리에서 말씀하셨고, 연계교회의 분명한 필요대로 준비할 수 있어서 더욱 알찼습니다.

3. 장흥 서부교회로 다시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

  작년에도 갔던 교회였는데, 그 때 짝궁”을 정했어요. 한 할머니를 품고 선교기간동안 내내 기도하고, 돌아와서도 기도하자는 취지였는데.. 제가 만났던 짝궁은 임향할머니였어요. 개인적으로 저의 선교 중에 첫 열매여서 평생 기억할 할머니었어요. 그 동안은 복음을 전해도 영접기도까지 하지만 그것이 선교대원에게 고마운 마음에 하는지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는지 느낄 수 있잖아요. 임향 할머니는 제 손을 꼭 잡아주시며 우리 늙은이들이 뭐라고 여기까지 와서 이 좋은 이야기를 해줘. 정말 고마워.”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이 한 마디 때문에 그 다음 선교도 가게됐고, 이번 선교도 가게 됐던 것 같아요.

 어쨌든, 그랬던 할머니를 도착하자마자 찾았을 때 작년에 앉아계셨던 그 자리에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인사를 하면서 보니 몸이 많이 안 좋아지셨고 주변 할머니 말씀으로는 치매 초기 단계라고 말시키지 말라고 하셨어요. 참 마음이 안타깝고 조급해졌었는데, 할머니와 진득히 앉아서 이야기 할 기회도 많지 않았고, 또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주변에서 말시키지 말라고 하셔서 많은 이야기를 못했어요. 치매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할머니가 맨 정신으로 복음을 들으셔야하는데 하는 마음도 들었어요. 수요일에 수요예배에 마을 어르신들을 모시러 가기 위해 회관에 찾았는데 분위기는 냉랭했어요. 다들 일찍 집에 가신다고 하셔서 한 할머니를 모셔다 드리는데 제가 귀찮았는지 저기 저 할머니 데려다드리라고, 몸이 불편하시니까 모셔다 드리라고 해서 보니 임향 할머니였어요. 뒤도 안돌아보고 임향 할머니한테 가서 집까지 모셔다드리겠다고 말씀드리면서 걸어가는데, 깜짝 놀랐어요. 작년에 했던 이야기와 동일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고 치매라고 맨 정신이 아닐거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 아니었구나 싶으며 아차 했어요. 복음의 확신을 여쭈었을 때 너무 오랫동안 믿지 않아서 못가.”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너무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고, 다시 용기내어 수요예배를 권면했어요. 사실 마을회관 앞까지 다시 돌아갔다가 집에 가셨는데, 할머니 때문에 다시 왔다고 1년 전에 만났을 때 할머니 짝궁이었다고 말씀을 드리며 복음 이야기를 했어요.

 선교대원과 임향 할머니의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 날 마을잔치 사역을 했어요. 준비했던 공연이 복례 인생 대역전이었는데, 개인적으로 할머니에게 들려주고 싶은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그 스토리가 어렸을 때부터 청년, 결혼하고, 또 죽기 전에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불러주시고 사랑하고 계셨다는 것이었거든요. 임향 할머니도 초등학교 4학년부터 시집가기 전까지 아버지에게 핍박 받으며 교회를 다니다가 시집간 후에 시집살이가 너무 심하고 힘들어서 장손집이어서 교회를 못나갔대요. 벌써 60년이 되었는데, 작년에 이어 이 교회를 재연계해서 가게 하셨던 하나님의 뜻이 너무도 분명해 보였어요. 임향 할머니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지극히 기다리고 계셨던 거였어요. 그 마음을 깨닫는 순간 참 감격스러웠어요.

 마지막 날 할머니에게 사영리를 들고 갔는데, 먼저 이걸 집에 가져가도 괜찮겠냐고 물어보셨어요. 얼마든지 드릴 수 있다고 집에서 읽어보고 또 읽어보시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선교대원과 할머니를 위해서 기도하고, 영접 기도까지 따라하셨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따라하시는데 너무나 감격스러웠어요. 탕자 이야기를 들려드리면서, 내가 여기 다시 오게 한 하나님의 뜻은 할머니를 다시 부르기 위해서였다라고 분명하게 전해드렸어요. 할머니가 어렸을 때 핍박 받으면서 신앙 생활 했던 모습을 하나님께서 아직도 기억하고 계셔서 돌아가시기 전에 여러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 할머니를 만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어요.


4.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것도 개인적인 간증인데, 선교 가기 전에 진모임에서 선교 팀장 인사를 하면서 어떻게 선교팀장을 맡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했었어요. 대학원 4학기를 마치고 논문을 남겨둔 상태였는데, 취업이 정해져있었어요. 방학 때 논문을 마무리 짓고 취업을 해야하는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방학이었기 때문에 선교 1주일은 빼야겠다 혼자 마음을 먹고 있었어요. 그 상황에서 팀장 제의가 들어왔고, 처음엔 교만한 마음으로 순종하지 못했다가 다시 콜링하셨을 때는 순종하게 되었어요.

교만한 마음을 깨뜨려주시기 위해 많은 시험이 있었는데, 먼저 취업의 문을 막으셨어요.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고, 취업을 빨리 해야하는 상황에서 취업의 문을 막으신 건 어이가 없었어요. 전공이 아동학이기 때문에 어린이집 취업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어린이집은 이직률도 높고, 눈만 낮추면 어디든 취업할 수 있는 곳이에요. 그런데 교수님께서 논문을 마무리 짓고 취업을 하라고 하셔서 한 학기가, 아니 그 이상이 늦춰질 수 있는 상황인거에요. 석사 졸업을 누가 그렇게 질질 끄는지.. 황당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고, 진행중인 연구 프로젝트도 연결되어 있어서 교수님 말씀에도 순종할 수 밖에 없었어요. 어쨌든 전 너무 억울하고 속이 상했어요. 선교 팀장을 맡겠다고 말씀 드린 다음 날이었거든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하나님께서 왜 취업을 막으시는지.. 그리고 논문을 쓸 수 있는 상황도 미지수였어요. 교수님께서 미국으로 안식년을 떠나실 계획이었고, 1226일자로 떠나셨었기 때문에 메일 상으로 진행이 제대로 될지 불안한 상황이었거든요.

우선 팀장을 맡았고, 어떻게 보면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에 더 충성하며 순종하는 모습으로 선교를 준비했어요. 팀 초반에 너무 술술 풀리고, 은혜로 대원들이 채워졌기 때문에 열정과 애정을 다해 선교 팀 준비를 했던 것 같아요. 선교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고, 취업의 문이 막혔다는 것에 대해 충격을 받아서인지 학교 일과 논문은 거의 손을 떼고 있었던 상황이었어요.

이 모든 상황이 지나고나니 이해가 되었어요.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교수님께서 설 지난 이후에 연락이 왔는데 한국이라고 만나자고 하셨어요. 교수님께 연락 온 시점도 매우 중요한데, 선교에 온전히 집중해서 준비하고, 선교하고, 설 때 푹 쉬고 나서 연락을 받은거에요. 그 동안 내려놓았던 일들을 몰아치기하느라 삼일 밤 정도 고생을 했지만, 만약 그 전에 연락을 받았으면 3일 밤 안에 초집중해서 끝날 일을 2, 3주 붙잡고 있었을 것 같아요. 어쨌든 미국에 안식년 가기로 하셨던 문제는 한국에서 안식년을 보내기로 하시면서, 저의 졸업까지는 어떻게든 마치게 하신다는 확답을 들었고, 어린이집인데 9월에 취업할 수 있도록 위탁 어린이집에서 기간제 교사를 채용하게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작년에 놓고 기도했던 기도제목이 논문 쓸 시점과 취업할 시점을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그 때에 잘 할 수 있도록이었는데, 그 타이밍이 너무도 기막히고 멋졌어요. 오히려 지금 취업하게 되면 논문도 흐지부지 못 쓸 수도 있고, 교수님이 미국에 계셨으면 취업을 하지 않았더라도 논문을 못 쓸 수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감동이 안될지 모르겠지만, 저에겐 큰 문제였고, 불안했던 미래였기에 이 모든걸 계획하고 이루신 하나님께 감사했어요. 물론 아직 논문을 쓰고 졸업한 것도 아니고, 취업을 9월에 확실히 한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런 계획에 대해 교수님께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비젼에 대한 소망을 품고 기도했는데, 이 또한도 선교 이후에 분명하게 제시해주셨어요. 주일에 기도하는 중에 영아기의 부모 지원을 통해 초기 양육 습관을 제대로 잡고, 이후 발달 단계에서도 건강한 부모-자녀 관계가 형성될 수 있도록이라는 비젼을 받았어요. 사실 이건 제가 아동학을 전공으로 선택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비젼이었는데 오히려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희미해졌었던 것 같아요.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인데 재발견했을 때 기쁨은 정말 대박이었어요. “선한 영향력이라는 모토로 학부 4, 대학원 2년을 이끌어주셨던 하나님께 감사했고, 취업과 이후 진로에 대해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앞으로 어떤 길로 어떻게 준비해서 나아가야할지 구체적으로 고민할 수 있었어요. 정책을 통해 좀 더 큰 영향력을 펼치고 싶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했었는데, 자신감 부족과 또 여러 가지 스펙의 문제로 주춤하고 있었거든요. 그 자리에 가기 위해 날 어떻게 준비시키고 어떤 자리에 보내실지 기대가 되었고, 교수님께서도 먼저 육아정책연구소 연구원을 목표로 두고 준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설레었어요. 현장 경험과 박사 과정, 연구 경력을 통해 실력을 쌓으면 기회가 올 것 같았어요. 교수님께도 추천해달라는 이야기를 듣는데, 마땅히 현장경험과 연구 경력을 두루 갖춘 사람이 없어서 추천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어떻게 준비해야하는지 그 길이 분명히 보였어요. 부족한 영어 실력을 갖추고 현장 경험을 통해 더 깨어서 정책에 적용할 수 있는 적용점을 찾고 발견하며 준비해야겠다는 비젼을 찾았어요.



제가 이번에 다녀온 장흥 서부교회는 4진에서 4번째 연계한 교회로 알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간증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도 4진 식구들이 많이 알고 있는 교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녀오신 분도 있을테고, 다녀오지 않았더라도 팀에서 중보기도 하셨던 분도 계셨을텐데요. 즐거운 이야기 좋았던 이야기 위주로 간증을 하다보니 선교는 Happy Ending인가보다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것 같아서요. 기도 부탁 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선교 다녀와서 살짝 눌렸던 마음이 있었는데, 여러 번 선교를 다니면서 점점 시골 미자립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을 더 직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서부교회 외에 다른 교회도 비슷한 사정일 것 같은데요. 8번째 삼일교회가 연계하다보니 대부분의 마을 어르신들은 복음을 들었고, 영접 기도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복음의 씨앗이 교회로 결신하는 것은 정말 많은 어려움이 있고 더 많은 중보 기도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년에 분명히 영접기도하셨던 분인데 올 해 이야기를 해보니 제사, 헌금, 가족 문제로 교회에 나가기 어려워하는 것 뿐 아니라 들었던 복음마저 간직하기 어려운 상태임을 느꼈습니다. 또한 어르신들도 선교팀이 오고 가는 것을 매년 해 온 행사로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받으시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목사님과 개인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기다리고 인내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묵묵히 그 마을을 위해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며 도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단기 선교로 1주일 안에 열매를 보고자 하지만, 그 열매의 때는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그 때까지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기도해야하는 사명을 허락하셨던 선교였습니다.

장흥 서부교회에 하나님께서 꾸준히 많은 열매를 주고 계십니다. 삼일교회 선교팀이 전도하여 성장한 어린 아이들이 이제는 청소년이 되었고, 그 아이들의 가정의 부모님이 하나 둘씩 교회를 나오신다고 합니다. 그 시간은 5년이 걸린 어머님도 계시고, 7년이 넘게 걸린 어머님도 계신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감격했었습니다. 또한 아이들의 입술에서 다른 지역으로 취업을 나가더라도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교회에서 받은 은혜는 잊을 수 없다는 고백을 들었을 때 그 아이들의 믿음이 성장하여 그 지역에 더 많은 영혼을 구할 일꾼으로 세워가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