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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의 사람人] 이어령의 딸, 변호사 이민아…사랑의 기적을 믿습니까?


[Why] [김윤덕의 사람人] 이어령의 딸, 변호사 이민아…사랑의 기적을 믿습니까?

  • 입력 : 2011.08.13 03:17 / 수정 : 2011.08.14 06:36

이혼·아들의 죽음·암·실명 위기… 시련을 딛고 땅끝 아이들의 엄마로

죽도록 사랑해서 결혼한 남자와 헤어졌다. 암(癌) 선고를 받는다. 다섯 살 아이는 특수자폐 판정을 받는다. 실명(失明) 위기가 닥친다. 가장 사랑했던 맏아들은 스물다섯 꽃 같은 나이에 돌연사한다…. 이민아(52)에게 시련은 일상이었다. 첫 결혼 후 3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웃은 날보다 가슴 치며 운 날이 많았다. 그러나 이민아는 말한다. “모든 시련과 고난이 내게는 축복이었다.”

미국 LA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이민아는 '한국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이어령(李御寧) 초대 문화부 장관의 딸이다. '저항의 문학' 이후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 지향의 일본인' 등 160권이 넘는 책을 펴내며 평생을 합리적 이성에 입각한 사유, 지적 작업에 매달려온 이어령 '교수'를 신(神) 앞에 무릎 꿇게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무신론자, 이성주의자임을 자처하던 70대 노장이 2007년 개신교 목사에게 세례를 받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딸의 실명이었다.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이어령의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 중에서) 자식의 고난 앞에서는 지성도, 과학도 힘을 잃는 걸까. 기적은 과연 있는 걸까.

4년 전 버클리대학에 다니던 맏아들 유진을 잃은 이민아는 2009년 목사안수를 받은 뒤 미국, 아프리카, 남미, 중국 등지를 돌며 마약과 술에 빠진 청소년 구제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건강이 나빠져 잠시 한국에 들어와 있는 그를 지난 4일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만났다. 검은색 투피스 차림의 그녀는 고(故) 하용조 목사의 영결식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이민아가 한 권의 책을 건넸다. '땅끝의 아이들'(시냇가에 심은 나무). "고난의 시절에 내가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사랑의 기적, 그 여정"이라고 말했다.

“내 안에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면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6시간이 넘는 인터뷰 내내 이민아 변호사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딸의 건강상태를 걱정한 어머니 강인숙 교수가“제발 그만 끝내라”고 말리자“난 괜찮아요. 하고 있던 말을 중간에 멈출 순 없잖아요”했다. 맏아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그녀의 모습은 평안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아이들을 사랑해주세요. 그 사랑을 아이가 강렬히 느끼게 해주세요. 사랑해주는 사람이 단 한명만 있어도 아이들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사랑의 기적

―왜 '땅끝의 아이들'인가.

"술, 마약, 폭력의 구렁텅이에서 희망을 잃은 아이들, 그 아이들을 살려낼 방법을 몰라 절망에 빠진 부모들의 이야기다. 내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혼, 갑상선암, 아이의 자폐, 맏이의 죽음을 겪으면서 절망의 나날을 보내야 했던 나 역시 땅끝의 아이였다. 그들이 참사랑, 새 생명을 얻어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다."

―책 표지에 '간증집'이라고 적었다. 기독교적 색채가 강하면 거부감이 생긴다.

"내가 변호사였다. 재판에선 증언을 한다. 증인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만 말할 수 있다. '간증'이란 말은 나도 잘 모르겠고, 영어로 테스티모니(testimony), 그러니까 증언집이라고 하는 게 맞다.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수학공식, 혹은 약처방, 실용적인 지침 같은 것은 아니다. 종교적 색채가 짙은 건 사실이지만, 이 책을 읽고 절망에 빠져 있는 단 한 사람, 한 가정만이라도 희망을 되찾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와의 인연이 깊다. 부친 이어령 교수도 하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갑상선 암이 재발됐던 1996년, 목사님이 LA의 한 교회에 오셨다. 하나님 믿으면 복받는다고 해서 믿었는데 암이 재발되니 내가 좀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웃음) 그런데 설교 중에 하 목사님이 자기도 아프다고 하시더라. 얼마나 아프면 강대상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설교를 하셨다. 그렇게 아픈 지 30년이라더라. '목사도 아픈가?' 하면서 쳐다봤다. 그런데 그 얼굴에 평안과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대체 어떤 존재일까, 호기심이 생겼다. 자신이 갖고 있던 사랑의 에너지, 그 마지막 한 방울까지 세상에 쏟아붓고 가신 분이다."

―장례식 때 많이 울었겠다.

"4년 전 내 아들 유진이를 하늘나라에 보내던 날 마지막으로 울었고, 그 이후로는 어떤 장례식에서도 울지 않는다. 육신의 껍데기를 벗었을 뿐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신 건데 울 일이 아니지 않은가. 내 아들 유진이의 묘비명도 'Resting in his Father's house'(아버지의 집에서 쉬다)이다."

1981년 이화여대 졸업식장에서 이민아가 아버지 이어령 교수와 함께 찍은 사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는데 어떻게 울지 않나.

"'나니아 연대기'를 쓴 영국 작가 C.S 루이스는 '바다의 파도 끝에 물이 잠깐 멈추는 순간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맏아들을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한 자기 위안으로 들린다.

"지금도 내 아들이 죽은 원인을 모른다. 감기 걸린 것 같다더니 그대로 쓰러졌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19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1년 동안 매일 울면서 신을 원망했다. 그렇게 원망 가득한 마음으로 유진이 또래의 비행청소년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가게 됐다. 떠밀리듯 그 아이들을 만났다. 신기한 것은 그 아이들을 유진이를 사랑했던 마음으로 돌보게 되더라는 것이다. 이전에도 검사, 변호사로 일하면서 청소년 문제 상담활동을 열심히 해왔지만 '내 아이'와 '다른 아이'를 가르는 벽이 내 마음에 있었다. 유진이가 죽은 뒤 그 벽이 사라진 거다. 아이들을 엄마의 사랑으로 품어주었더니 변하기 시작하더라. 술과 마약을 끊고 부모에게 돌아가더라. 서른 명의 아이들이 나를 '마마미나'로 불렀다. 유진이가 그리워 내가 울면 아이들이 나를 안고 기도해줬다. 유진이의 죽음이 한알의 밀알로 내 가슴에 떨어져 이기적이었던 나를 세상의 어머니로 거듭나게 했다."

―그렇다고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유진이는 죽지 않았다. 아이들을 통해 나는 매일 유진이를 만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의 비밀이 그 속에 있다."

이어령의 딸

부러울 것 없는 삶이었다. 이어령 교수, 강인숙 건국대 명예교수의 1녀2남 중 맏이로 태어난 이민아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3년 만에 조기졸업한 수재였다. 그런 그가 1981년 졸업하자마자 무명의 청년작가 김한길(전 문화부 장관)과 미국으로 떠났다. 걱정하는 부모의 눈길도 뿌리친 채 정말 자신을 사랑해줄 남자와 새로운 삶을 꿈꿨다. 이민아는 자신의 청소년기가 행복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오늘 눈을 감고 아침에 안 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정말 살고 싶은 삶은 어딘가 딴 곳에 있고, 완전히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희망에 맞춰가면서 가상의 인간으로 살고 있는 듯한 회의에 빠졌다….’(‘땅끝의 아이들’ 중에서)
―‘이어령의 딸’로 사느라 진짜 이민아의 삶을 살지 못했다고 썼더라. 집안 망신 안 시키려고 공부했다고 썼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아버지 서재에 숨어들어가 술을 마셨던 얘기도 나온다. 이어령, 강인숙 교수로서는 꽤 당황스러울 것 같다.

“아버지가 이 책의 원고를 가장 먼저 봐주셨다. ‘괜찮다’고 하시더라.(웃음) 잘 읽어보면 부모님을 원망하는 내용이 아니다. 10대의 굴절된 렌즈를 통해 부모를 바라봤던 나의 이야기이고, 동시에 그 시기 아이들의 눈에 어른들이 어떻게 보여지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나의 부모님은 한국 부모로서 거의 완벽한 분들이었다. 문제는 사랑에 대한 어른과 아이의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작가, 교수, 논설위원 등 3개 이상의 직함을 가지고 살며 늘 바쁜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면 그 팔에 매달려 사랑받고 싶은 딸이었는데, 배고프고 피곤한 아버지는 ‘밥 좀 먹자’ 하면서 나를 밀쳐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유복한 집안에서 밥 굶지 않고 자란 아이의 배부른 푸념으로 들릴 수 있다.

“사소한 어긋남에서 부모와 자녀의 단절이 시작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사춘기의 아이들은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한다. 부모의 사랑 방식을 알지 못한다.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 또한 부모와 엄청난 단절과 갈등을 겪는다.”

―‘아버지’ 이어령은 어떤 사람인가.

“내가 아는 사람 중 자기 일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아버지가 참 좋았다. 존경스러운 게 아니라 그냥 좋았다. 일에 대한 무한한 열정이 있었고, 돈을 많이 벌려고 일을 하신 적이 없다. 창조, 새로운 지식을 알고 배우는 것, 가르치는 것을 즐거워하셨다.”

―아버지의 외모를 많이 닮았다.

“둘 다 완벽주의자다. 아버지처럼 문학을 했고, 글쓰기를 좋아했다. 책도 엄청나게 읽는다. 토씨 하나 잘못된 문장을 견뎌내지 못했다.(웃음)”

―어머니 강인숙 교수는 팔순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영인문학관 관장으로 활동한다.

“엄마의 집은 언제나 질서가 있고 안전했다. 뭐든지 잘하셨고 빈틈이 없었다. 속옷은 한국 면(棉)이 최고라며 지금까지도 직접 딸의 속옷을 사서 부치는 분이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평창동 이어령 교수의 서재에 앉아 인터뷰하는 이민아 변호사.“ 중학교 시절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아버지의 서재에 몰래 숨어 들어와 위스키를 훔쳐 마신 적이 있다”며 그녀는 활짝 웃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첫 결혼의 실패

―김한길과의 첫 결혼에 실패했다. 책에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한 사랑이었다’고 썼다.

“아버지에게서 얻지 못한 사랑을 첫사랑에서 찾았다고 착각했다. 이것만 있으면 딴 건 아무것도 없어도 된다고 믿고 미국으로 왔는데 그 남자의 세계 또한 나와는 단절돼 있더라. 스물두 살, 너무 어리고 철이 없을 때이기도 했다.”

―5년간 지속된 결혼생활이 많이 힘들었나 보다.

“말도 안 통하는 미국에서 아이 낳고 공부도 하고 돈도 벌어야 하니 죽을 맛이었다. 흑인들도 마다하는 일자리, 밤을 새우는 주유소 일을 최소 일당을 받으며 했고 낮에는 햄버거 가게에서 일했다. 반대하는 결혼을 했으니 남편은 자존심에 더욱 이를 악물었을 테고 그러면서 서로에게 지쳐갔다.”

―책에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에 대해 썼다.

“부부가 있다. 남편은 주말에 차고를 깨끗이 청소하며 부인의 가사를 돕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부인은 주말만이라도 남편과 손잡고 바닷가를 거니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소한 어긋남이 쌓여 파경으로 치닫기도 하는 게 인간의 삶이다. 그걸 몰라서 남편과 힘들었다. ‘여보 내가 맛있는 거 해놨어’ 하면 ‘나 지금 밥 먹을 기운 없어’ 하고, ‘나랑 얘기 좀 해, 나 안 좋아?’ 하면 ‘왜 이렇게 귀찮게 해!’ 하면서 음성이 높아졌다. 그러면 어릴 때 아버지가 ‘원고 마감시간이야, 얘 좀 데려가!’ 하고 소리질렀을 때처럼 가슴이 찢어졌다.”

―원망은 없으신가.

“전혀. 내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유진이를 함께 낳았고, 아들에겐 정말 좋은 아버지였다. 유진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버지로서 최선의 역할을 다한 사람이다. 나는 결혼이 언약이라는 것을 몰랐다. 지금 많은 젊은 사람들이 연애지상주의에 젖어 있는데, 나 또한 그랬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지만, 사랑이 식었는데 억지로 맞춰서 사는 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문화적인 거짓말에 속았고 자기애도 강했다.”

―지금의 당신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 타인의 아픔이 내 아픔보다 더 크게 느껴지고, 그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건가.

“나 자신을 죽이고 남을 섬기는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예수의 십자가 사랑이다. 그 사랑의 에너지를 돌처럼 딱딱한 내 심장에 끊임없이 충전받아야만 말썽꾸러기 자식에게, 원망스럽기만 한 배우자에게, 생판 모르는 이웃에게 폭풍 같은 사랑을 쏟아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늘의 태양, 그 햇살이 없이 내 힘만으로 화초를 키울 수 없다는 뜻이다.”

종교와 사교

―재혼해서 얻은 둘째 아들은 특수자폐 판정을 받았다.

“아이를 받아주지 않아 초등학교를 다섯 번 옮겼고, 중학교도 1년 다니다 쫓겨났다. 하루도 내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아이가 밉고, 가족도 싫더라. 그때 깨달았다. 내가 내 아들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그래서 회개하고 하와이에 있다는 크리스천 스쿨을 찾아갔다. 그 학교 보조교사로 일하면서 아이를 돌봤다. 아이를 내 몸처럼 사랑하려고 기도했다. 그렇게 1년이 흐르자 아이의 자폐증상들이 봄눈 녹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칵테일’이라고 부를 만큼 한꺼번에 7~9개의 약을 먹어도 낫지 않던 자폐가 그렇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최고의 지성인 이어령 교수가 세례를 받은 계기가 당신의 실명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딸의 불행 앞에서 신에게 무릎 꿇고, ‘딸의 눈을 뜨게 해주면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다’고 서언한다. 그리고 7개월 만에 딸의 망막박리증세가 감쪽같이 사라진다. 기적이라고 말하지만 우연의 일치는 아니었을까.

“그래서 아버지가 나더러 간곡히 부탁하셨다. 절대로 밖에 나가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모든 사람이 널 비웃고 우리를 박해할 거라고. 기적은 구제의 사인이지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지 않으냐고 하셨다. 맞다. 기적은 상징이 아니라 실제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신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인간에게 보내는 신호일 뿐 종교의 본질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랑의 실천, 복음이 없는 기적은 사교(邪敎)에 불과하다.”

―2년 전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회자인 당신에게 한국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가.

“나는 우리 한국교회가 예수가 세웠던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형화, 세속화되어 일어나는 온갖 잡음과 분란은 지금 이 순간이 한국 교회가 새롭게 변해야 할 시점임을 암시하고 있다. 대형교회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에는 너무나 커버린 조직에서 가족 단위의 교제, 사랑과 돌봄이 일어나기 어렵다.”

―성장일로, 자본주의식 복음주의의 폐단이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예수 믿어야 천국 간다’는 피켓 구호에 사람들은 혐오감을 느낀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교회에서 위로받지 못한다.

“교회는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이다. 많은 경우 하나님을 보지 않고, 목회자와 교인들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교회에 사랑이 없는 것,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적어도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병자들, 갈 곳 없어 방황하는 10대들,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교회가 끌어안고 치유할 수 있어야 한다.”

땅끝의 아이들

―최근에는 미국, 아프리카, 남미 등지를 돌면서 청소년 선교에 열심이라고 들었다. 원래 전공은 영문학 아니었나?
“문학이 적성에 안 맞았다. 추상적인 사고가 내겐 너무나 어려웠다.”

―해스팅스 로스쿨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처음엔 LA지방법원 검사로 일했다.

“아이 넷 수월하게 키워보려고 공무원인 검사를 10년 했는데, 남을 정죄하는 직업이 점점 힘들어지더라. 그 무렵 한인교회 목사님으로부터 급히 연락이 왔다. 갱단 범죄에 연루된 교포 아이가 종신형을 선고받을 것 같은데 나더러 그 아이 변호 좀 해달라는 거다. 나는 검사라서 맡을 수 없다고 했더니 사직을 해서라도 맡아달란다. 아이를 한 번만 보고 오자고 했다가 코가 꿰인 셈이다.”

―교포 2세대의 문화단절, 세대단절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일까.

“술과 마약의 문제는 사랑의 문제다. 처음엔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가 대부분 건실한 크리스천이었고 자식에게 헌신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를 변호사로 이직하게 한 K라는 아이만 해도 부모에게서 상처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데 엄마 아빠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뛰쳐나갔다. 아까도 말했지만, ‘사랑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선물을 받아야 사랑받는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한다’고 말해줘야 사랑받는다고 느낀다. 사랑은 이렇듯 구체적인 거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한다’고 느끼게 해주면 폭력과 어둠의 세계에 빠져 있던 아이들이 울면서 아버지의 품에 안긴다.”

―아프리카 케냐에도 갔다.

“나이로비에서도 비행기로 두 시간을 더 가야 하는 웨브예라는 마을은 그야말로 땅끝이었다. 샘물이 없고, 오물이 흘러들어온 강물로 밥을 해서 먹는다. 아프지 않은 아이들이 없다. 아이들 배가 다 맹꽁이 배처럼 튀어나왔고, 목욕을 태어나 한 번도 안 해서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거기서 내 사랑의 위선을 보았다.”

―무슨 얘긴가.

“아이들이 나를 끌어안는데 역한 냄새가 진동하니 참을 수가 없더라. 그날 밤 꿈을 꿨다. 온몸에서 피고름이 흐르는 남자가 자기 좀 도와달라고 외치는데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하고 곁에 가질 못한다. 그때 누가 저 멀리서 뛰어오더니 단숨에 병자를 끌어안는다. 그의 눈물이 닿는 곳마다 병자의 상처가 나았고 피와 고름이 멈추었다.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기에 우리의 갈 길은 이렇게 멀다.”

―이혼, 암, 실명, 아들의 죽음 등 당신에게 닥쳤던 시련을 축복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내 생애 가장 기뻤던 순간이 죽을 것 같은 진통 끝에 첫 아이를 낳아 눈을 마주친 순간이었다.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없다. 불 사이를 지나지 않으면 금(金)이 정련되지 않고,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온다.”

―건강이 다시 나빠져 잠시 한국에 들어와 있다고 들었다. 숱한 고비를 넘겨왔는데 두렵지 않은가.

“오늘 죽는다면 오늘이 세상을 떠날 완벽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부를 그날까지 땅끝에 선 아이들 가슴에 사랑을 심어주고 싶다.”

―요즘 당신의 기도는 무엇인가.

“내 마음에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게 하소서.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 모든 죽은 것들을 살린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8/12/2011081201142.html
 출처 : 인터넷뉴스 조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