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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4 월(내 삶의 간증, 아와세와 우리 가족)



다사다난한 나의 삶

참 열심히 살고 있다.

그 한 마디로 나를 위로하고, 나에게 힘을 준다.
누군가의 격려, 지지가 아니라, self 칭찬

어렸을 때부터의 가장 큰 소원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 이었다.
나의 좌우명은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었고

난 내가 서 있는 이 곳에서, 정말 무수히 많은 노력을 하며
나의 희생에 대해 조금도 부정적인 마음 없이 기꺼이 감당하고 있다.

감사하고, 행복한 부분이다.

일이 싫다면, 주변 사람들이 싫다면, 아이들, 가족이 싫다면 ..

소름끼치게 놀랐다.

나는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소아정신과 연구실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동생은 장애가 있다.
그래서, 막연한 꿈으로 ‘장애를 가진 아이들, 부모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었다.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다.

내가 2005년도에 쓴 일기를 발견했다.
하나님은 묵묵히 나의 인생을 인도해가고 계셨다.
어린이가 좋아서 아동학을 전공했는데, 아이들과 가까이 상호작용하는게 두려워 연구를 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갖고 진로를 선택했다.
어느 곳에서든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그게 한 명이 되었든 두 명이 되었든, 여러명이 되었든 모든 선한 영향력이 흘러 그 아이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고, 전보다는 더 낫게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을것이라 기대했다.

가슴 뛰는 일을 늘 쫓아왔다.
아이 셋을 낳고 임신했을 때, ’두려워 말라‘라는 말씀으로 내 마음을 위로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한다.
결혼의 선택의 기로에서도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말씀으로 내 마음을 잡아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한다.

선교,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그 곳에서 난 나에게 허락하신 복음을 깨닫는다.

몸을 갈아 넣어, 내 모든 것을 던져 살고 있다.
매일 밤이 되면 휴대폰이 방전 되듯, 나는 지쳐있고 피곤해있고 무기력해있다.

선교 때가 되니,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 우리 가정을 끔찍히 사랑하셔서 축복하고 계시는 것,

아무 힘이 없고,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늘 불안해 하고 있던 나에게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내 딸아, 너의 작음도 내겐 귀하다“

정신과 상담을 다니고 있다.
가게 된 계기는, 셋째 낳고 산후 우울증이 엄청 심하게 왔다.
셋째를 낳으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 불안감으로 모든게 뾰족해 있었다.
코로나 시기에 세 아이를 양육하며 어린이집을 보내지 않고 데리고 있는 시간이 많았다.
엄마는 크게 아프셨고, 폐에 종양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수술 직전까지 갔었으나, 다행히 열이 잡혔고 기침도 나아졌고 수술하지 않고 퇴원하셨다.
첫째 아이는 마냥 순수했지만, 셋째가 귀여워 자고 있는 아이를 만져서 깨우는 일이 반복됐다.
그 때마다 엄청나게 화가났고, 화를 냈다. 둘째의 떼도 더 심해지고 엄마만 찾고 의존하는 모습들이 있어서 도망가고 싶었다.
첫째, 둘째의 심리적 불안감 때문에 ‘소아정신과’를 인터넷에서 검색하게 되었고, 첫째 아이 상담, 둘째 아이 상담, 그리고 부모 상담을 시작했다.
그리고, ‘소아정신과 연구원 공고’를 보게 되었다. 처음엔 흘려봤는데, 아이들 병원을 찾고 나서 내 묵혀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냈다.
줌으로 인터뷰를 보는데, 모두 쟁쟁한 사람들이었다. 면접을 하는 동안 경력이 끊긴 부분을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임을 밝히게 되었다.
거짓말은 못하니, 몇 명이냐는 질문에 세 명이라고 답했다.
떨어질 줄 알았는데, 4월부터 시작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맡을 연구원이 필요했고, 교수님은 나를 적임자로 생각하셨다.
처음에는 너무 두려웠다. PMO라는 처음 듣는 구조(?) PMO를 공부해야하나 싶었는데.. 연구도, 인공지능 파트도, 앱도, 플랫폼도 자폐 스펙트럼 장애도 공부해야 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화두에 오르자, 자폐스펙트럼 장애는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나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
예산도 관리하고, 연구도 관리하고, 참여 업체, 참여 연구팀 관리까지 전체를 관리하는 자리에 혼자 있었다.
꼭 마치 요셉이 총리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 상상이 되었다.
103억 예산의 과기부, 복지부에서 관심을 가지는 혁신도전프로젝트였다.

하나님은 내게 도울 자를 붙여주셨다. 먼저 우리 언니. 언니의 박사 논문 주제는 ‘인공지능 역량‘을 갖춘 인재상 관련된 것이었다.
인공지능에 대해 들어만 봤는데, 언니의 논문 작성을 도와주면서 어설프게라도 인공지능 흐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공지능 전문가가 옆에 있었다.
박사과정을 하면서 예산, 국가 연구 과제 경험이 많았던 언니가 나의 서투른 행정 일을 많이 도와줬다.
교수님께 메일 쓸 때도, 줌 회의 일정 정할 때도 하나하나 컨펌 받아가며 사수 받았다.
언니는 제자를 키우는 재미로 나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그리고 믿음의 동역자이면서, 나에게 굉장히 마음을 써주시는 행정 담당 선생님이 계셨다.
지금은 이 선생님과 ’자폐 아동을 이해하기 쉽게 쓰는 동화‘를 같이 기획하고 있다.
지쳐 보일 때는 가끔 찬양 유투브를 보내주시고, 하나님이 ’한나 선생님과 가정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아요‘라는 따뜻한 메시지로 위로해주신다.

여러 위기, 고난, 힘든 상황이 있었지만 턱없이 부족한 나의 능력에도 교수님은 나의 ’진심‘을 알아주셨고, 세워주시고 믿어주시고, 함께 하길 원하신다.

아이가 갑자기 아플 때, 언제든 달려가볼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직장
일이 밀리거나 실수해도 ’그럴 수도 있죠, 괜찮아요.‘라고 토닥여주고 오히려 위로해주는 동료들
세계적으로 학식이 있고, 역량 있는 연구자들과 함께 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사실, 돌이켜 생각하면 정말 정말 감사한 곳인데
일을 할 땐 모른다.
’이 일도 내가 해야해?‘ ’이 사람은 내게 왜 이러지?‘ 등등의 매일 매일 불평 속에서 지내기도 한다.

선교는 내게 큰 유익이다.
그냥 하루 하루 버티는 것이 전부였던 내게
’오늘‘이 얼마나 값진 선물이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큰 축복의 날인지 깨닫게 된다.

정말 육체적으로 쉴 시간이 없고, 정신적 여유가 없고, 나를 돌볼 에너지 조차 부족해 늘 허덕이고 있어서
아이들이 예쁜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도 놓치고 있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내 딸아 네 연약함도 내게 힘이라“라고 말씀하셨다.
“너로 인해 잃어버린 나의 양들이 돌아오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지난 겨울 차수에 일본 선교에 가지 못했지만, 000 할아버지의 세례 소식을 전해들었다.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보았다.
내가 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공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기억하며 이 소식을 전해주시는 분들께 감사하면서도 약간은 부담스러웠다.
그렇지만 정말 정말 그 소식을 전해주셔서 감사했던 것은, 나는 그 자리에서 내 어떤 삶을 나누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누님도 할아버지가 예수님 믿고 천국 가길 바라실거에요. ”라고 진심을 전했고
하나님이 할아버지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렇게 귀한 가족들의 기도로 복음의 씨앗을 계속 뿌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2016년 여름, 첫 선교의 첫 가정 심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할아버지의 구원의 감격이 그 가족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고 행복일지 알고 있다.
선교를 계속 오가면서, 그 기도제목을 계속 들어왔고 가끔 한 번씩 한일교류회(코리안파티) 때 와주시면 정말 그 걸음으로도 너무 반가웠으니까.
그들의 간절함, 그들의 소원, 그걸 뛰어넘는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이 얼마나 큰지 다시 깨닫게 되었다.
현장에 없지만, 지속적으로 아와세 교회와 소통하며 함께 할 수 있었기에 이 기쁨을 나눌 수 있어서 감사했다.

아와세를 오가며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 중 정말 스치듯 흘러갈 인연이었을 수 있지만 기억나는 사람들이 몇 있다.
이름도, 그들의 사정도 가물가물하지만.. 함께 손을 잡고 눈물로 기도했던 그 순간들이 찡하게 남는다.
임신해서, 혹은 아이를 데리고 혼자 갔던 선교, 모두 나는 ‘연약한 모습’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게 뭐가 있겠어, 폐나 끼치지 않으면 다행이지’라는 생각으로 늘 고민 고민을 하다가 던졌는데
이번에는 말괄량이 아이 셋과 함께 왔다. 뒤만 돌아서 있으면 사고치고, 다치고, 넘어지고, 울고 있고, 싸우고 있고..
사실 두려운 마음이 더 크다.
사역에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할텐데.. 선교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누려보겠다는 내 욕심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이 찬양으로 내 마음에 말씀해주신다.
“ 너와 함께 걸어가는 모든 시간이 내게 힘이라“


두서 없이 내 생각의 흐름대로 적어보았다.

2016년 여름 아와세 선교를 시작으로, 우리 가정은 시작되었다.
결혼의 고민을 기도제목으로 가지고 선교에 갔던 내게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나니’라는 말씀으로 마음을 정하게 하셨고,
아와세 온 교인의 축복을 받으며 하나님께서 정말 축복하시는 가정임에 확신을 가졌다.
신혼 초에 참 많이 다투고, 힘들었다.
2017년 겨울, 태평상만 휴가를 받아서 선교 등록을 하였는데 선교 떠나기 전 아와세 밤에서 하나님이 아와세 초창기 멤버들의 사진을 보여주시며  ‘퍼즐 조각’을 떠올리게 하셨다.
태평상의 달란트 일본어, 태평상과 아름언니가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만나 나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그렇게 아와세와의 연결고리로 우리 초초초초기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
독신주의였던 태평상의 의미없이 방문했던 아와세교회에서 첫 가정심방을 하면서 믿음의 가정의 모습을 보고 도전을 받아 결혼에 대한 꿈을 꾸었던 것.
눈물로 기도를 했다. 정말 하나님이 시작하신 가정이구나, 이 퍼즐 한 조각 한 조각이 내게 너무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렇게 마음의 평안함과 기쁨을 회복하였다.
선교 떠나는 아침에 첫째아이 임신을 알게 되었다.
선교 떠나기 전 아와세의 밤에서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퍼즐을 바라보지 못했더라면 임신 소식이 내게 어떤 의미였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

호아를 뱃 속에 품고, 일본어 공부도 처음으로 시작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 같다. 스미마셍)
임신해서 간 선교, 아슬아슬 했다. 32주가 넘으면 비행기도 안태워준다는데.. 32주 가까스로 의사 소견을 받아 비행기를 탔다.
그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 은혜 다시 느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첫째 아이 10개월 때, 일본선교를 함께 갔다.  다녀와서 보니 둘째를 임신했다.
힘든 선교 기간이었을텐데 안정적으로 착상하고 엄마 몸에서 생명을 틔운 넌 보통 아이가 아닐거라 생각했다.

둘째 임신 중, 첫째 아이 16개월 때 신랑 없이 아와세를 다시 찾았다.
늘 신랑이 통역을 하기 때문에 곁다리로 따라가는 느낌이었는데,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임신이라는 노약자가, 말귀 잘 안 통하는 16개월 아이를 데리고 간다는 것이 도전이었다.
언제나 ‘늘 환대해주는’ 아와세 선교팀, 그리고 아와세 식구들에게 고맙다.
16개월이었던 호아는 아와세 선교팀 선교대원, 특히 현주언니를 잘 따랐고 아와세 초등학생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고 놀았다.
중요한 예배 시간에는 잠들어주었고, 필요할 때는 찌라시도 나누어주며 귀여움을 받았다.
모든 것이 행복이고 소중했던 추억이다.
그런데, 잘 진행되는 선교 중에 신랑은 전화로 중요한 이야기라며, 실직 소식을 전했다.
뱃 속에는 7개월 된 아이를 품고 있었고, 첫째 아이는 16개월이다.
당장 실직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고 눈물이 쏟아졌다. 소영상이 옆에 있었다.
어떤 위로도 마음이 안 잡혔는데, 역시 말씀이었다.
하나님은 늘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흔들리는 마음 속에 ‘말씀’을 심겨주셨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게 내게 부와 명예, 안정을 더하시는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손가락을 쪽쪽 빨고 살더라도, 우리 가정, 내 뱃속에 있는 태아까지도 책임지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선교에서 이 소식을 들은게 감사했다.
웃으면서 선교를 잘 마무리했고, 신랑은 둘째 출산 2주 전에 재취업이 되었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이고, 아직까지는 짤릴 위험 없이 잘 다니고 있다)

둘째 돌이 되고 나도 일을 하고 싶어서 슬슬 시작했다.
연구도 재밌었고,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졌고, 하고 싶은 공부도 생겼다.
그러다가 셋째 임신을 했다. 계산을 해보니 대략 성탄절에 온 아가였다.
꿈이 많고, 이루고 싶은게 많았던 때라 정말 기쁨보다는 당황스러움이 앞섰다.
그 때 온라인 선교 첫 기도회가 시작되었다. 줌으로 모여 말씀을 듣는데 누가복음 1장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하는 말씀이 설교 주제 말씀이었다.
그렇게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하니(눅1:28)”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하고 들은 이야기지만, 우리에게 찾아온 셋째도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주신 선물이라는 생각에 눈물과 감동이 앞섰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전히  좌충우돌, 여전히 부딪히고 싸우고, 토라지고, 지지고 볶고 서로를 할퀴었다가 안쓰럽게 보고를 반복하고 있지만…
선교 때마다 나에게 기억하게 하시는 것은 “은혜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우리 세 딸, 하나님 앞에서 귀한 예배자로 사랑받은 자로, 은혜 받은 자로 자라나길 진심으로 기도한다.
아동학을 조금 배웠다고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거라는 교만함에 오히려 실수하고 내 성에 못 이겨 화를 낼 때 반복되는 죄책감 & 자괴감으로 고통스러워 했는데
이 모든 시간도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통하여 하실 일들을 기대하게 된다.


간증을 생각해보고 쥐어짜보았는데,
정말 많다.
만 36년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이 날 떠난 적이 없고
나의 실수, 교만함, 악한 행실을 할 때도 ‘기다려 주시고’ 오히려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더 많은 깨달음, 배움, 지혜를 허락하시고 단단하게 하셨다.

아픈 동생.
동생이 8살에 사고가 났고, 내가 10살 때였으니 나는 26년 동안 아픈 동생과 함께 해왔다.
엄마에게는 무척 힘든 삶이었을거라고,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가 한 번씩 아플 때, 큰 병원을 갈 때 느끼고 있다.
하루씩 응급실 다녀오는 것도 철렁하는데, 응급실에서 열흘씩도 있어봤고(자리가 안 나서)
중환자실에 약 3개월간 입원하여 면회 시간 30분 허락되는 시간 외에 만나지 못하지만 옆에 대기실에서 언제든 보호자를 부르면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했다.
중환자실 앞이 놀이터처럼 저녁엔 엄마와 동생을 보러 병원에 다녀왔다.
밤에 엄마와 잠을 자지 못할 때는 매우 아쉬워했고, 다음 날 준비물도 부랴부랴 챙겨야 하는게 늘 싫었다.
엄마는 그렇게 새벽에는 중환자실에서 쪽잠을 주무시고, 아침에 아빠와 교대해서 우리의 등교를 챙겨주셨다.
막내 아이의 생사가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 두 아이를 챙겨야 하는 분주함, 모든 힘듦 속에서 나는 엄마의 힘듦을 보지 못하고 자랐다.
철이 없어서였을까, 하나님 은혜였을까.
하나님은 우리 가정에 주어주신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하셨고, 동생이 조금이라도 숨을 쉬거나, 앉을 수 있게 되거나, 목소리를 내거나, 하는 작은 변화에 감동과 감사를 올렸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공부는 스스로 해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선생님들도 그런 모습을 예뻐하셔서 남는 문제집을 많이 가져다 주셨다.
답이 다 적혀있는 교사용 문제지의 답을 지워가며, 공부했다.
공부하는게 즐거웠고, 재밌었다. 도서관 다니는 것도 좋아했다. 도서관 선생님들도 예뻐해주셨다.
그렇게 선생님들의 사랑, 교인들의 사랑, 주변 사람들의 사랑, 목사님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동생이 걷게되고, 집으로 오게 되었던 날도 너무 행복했고 감사했다.
아픈 동생이 집에 있는게 챙피하지 않았다.
가끔 불편한 것은 있었지만, 우리 동생은 늘 언니들의 사랑둥이고 귀염둥이었다.

막둥이를 바라보는 첫째, 둘째의 시선에서 우리 어렸을 때의 모습을 본다.

동생의 사고는 순간이었고, 돌이킬 수 없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20살이 되었을 때는 하나님께 원망의 기도도 했다.
왜 우리가정이냐고, 우리 엄마냐고, 왜 … 그 사고도 막을 수 있었던 전지전능하신 분이 믿음 좋고 순수하고 착한 우리 엄마에게 평생 짐을 주셨냐고.
이게 이성적으로 해결되지 않아서, 방황하고 또 방황하고.. ‘일부러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라고 마음을 굳게 먹고 교회를 다녔다.
모태신앙에 교회를 안가면 엄마, 아빠가 화내니까? 엄마 아빠를 위해서 교회는 나갔다.
그렇지만, 설교 시간에 말씀을 들으며 하나하나 반박하고 하나님께 따져들었다.
불손한 나의 모습도 그냥 지켜보셨다.
그러다가 삼일교회를 만났다.
먼저 서울로 올라간 언니가 삼일교회를 소개해줬고 난 그냥 예배만 드렸었는데 자연스럽게 자기 팀에 초대하고,
선교에 등록해버렸다.
가기 싫다고 발버둥 치고 있었는데, 겨울성경학교 한다는데 .. 그냥 가서 애들이랑 놀아주면 된다는 말에 따라갔다가..
낚였다.
장흥 선교 첫 날 ‘돌아온 탕자’ 말씀을 퍼부으셨다.
나보고 돌아온 탕자라는 거지?

사영리도 제대로 모르고 갔고, 하나님에 대해 믿음의 확신이 없을 때 선교를 갔는데
옆에서 사영리를 연습하는 팀원이 있었다.
뭔가 규칙처럼 얘기하는게 설득력이 있을까 싶었다.

다음 날 마을 회관에 갔다.
내 옆에 있는 할머니가 자기가 어렸을 때는 교회를 정말 열심히 다니다가 교회다니는 것으로 핍박을 받아서 그 이후로 교회를 안가고 있다고 하셨다.
찬송가를 펼쳐놓고, 좋아하셨던 찬양도 알려주셨다.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할머니, 저도 사실은 어렸을 때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 지금은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제 말씀을 듣는데 하나님이 저에게 “사랑하는 딸아, 많이 기다렸단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돌아온 탕자 이야기 아세요? 하나님 없이 살고, 주어진 재산을 다 방탕하게 썼지만 여전히 사랑하고 기다리고 계셨던 하나님이요.
지금 하나님이 할머니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 같아요. “

그리고, 또 이야기 했다. ‘전 사영리 잘 몰라요. 여기 옆에 있는 형제가 같이 이야기 들려줄거에요’ (어제 열심히 연습하던 오빠를 콕 집어 연결해줬다)
그 때 사영리를 들었다. 그 동안 하나님을 모르고 지었던 나의 죄를 용서해주세요. 예수님 믿고 구원받기 원합니다. 나를 자녀 삼아주세요.
눈물을 흘리며, 내가 영접했다.

그렇게 뜨거워졌고, 그렇게 하나님을 다시 만났다.

밑도 끝도 없는 하나님의 작전이 통했다.
동생이 왜 다쳤는지, 우리 가정에 왜 그런 고난을 주었는지 여전히 답은 찾지 못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 동생을 우리 가정에 주신 것은 분명 축복이고 선물이고 그건 여전하다.
우리 가족이 이런 고난을 당한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문득했다.

같이 일하는 동료는 굉장히 능력이 있고 대기업에서도 잘나가는 부서에 있었다.
아이가 자폐성 장애 판정을 받고, 회사를 그만 둔 후 자폐 치료를 공부하기 위해 심리학과 석사를 들어갔다.
그 분과 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의 사진을 보면
그 아이는 동료분의 아이로 태어난게 정말 큰 축복이라는 생각을 했다.

문득, 우리 동생도 우리 엄마의 딸이어서 너무 다행이고 감사하다, 동생 인생을 봤을 때도 축복이겠구나 싶었다.
세상적으로 봤을 때 우리 엄마, 아빠가 이루신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일지 모른다.
커다란 부를 남긴 것도 아니고, 명예를 얻으신 것도 아니고, 안정된 삶을 사신 것도 아니다.

내가 매일 꿈꾸는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 오롯이 나만을 위한 독립적인 시간은 우리 엄마는 평생 갖기 어려우셨다.
아마 2019년도 여름 코로나 직전에 갔던 선교 기간이 동생과 떨어져 지냈던 가장 오랜 시간이지 않았을까 싶다.

  엄마는 사랑을 남기셨다.
  아빠는 꿈을 남기셨다.

매일 효도하지 못하고, 두 분께 짐을 안겨드리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지만
  두 분은 내게 가장 큰 유산, ‘믿음’을 남겨주셨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라운 특권을 남겨주셨다.

코로나 시간 동안 육아에 워킹맘 삶에 여러가지로 치여 지내면서 믿음을 뒷전으로 지내오고 있었는데
선교에 가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막막했는데
주저리 주저리 쓰다보니 내 모든 인생이 ‘간증’이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임을 고백할 수 있어 감사하다.

“너와 함께 걸어가는 모든 시간이 내게 힘이라“


우리 가족의 말씀은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다.

선교는 늘 이 말씀때문에 떠난다.
내가 먼저 구해야 하는 그 나라와 그 의,
나의 편함과 안락함, 귀차니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

부르심이 있었기에 따라가는 것이겠지만,
늘 감사와 기쁨이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부족하고 연약한 때에도 ’늘 환대‘해주는 동역자들에게 고맙고, 마음 불편하지 않게 늘 배려해주어 감사하다.

아와세는 우리 가족의 믿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전 송태근 목사님께서 하셨던 말씀 중에 마음에 박힌 몇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눈금‘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우연으로 그 일이 일어날지라도, 성도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섭리 뜻을 생각하게 되고 그러한 간증이 모여 삶이 되는 것이라고.
내 삶이 그렇다.

매우 우연스럽다.
소아정신과 검색도, 교수님 연구실에 들어가게 된 것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하는 일의 의미,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들.. 어떤 인연이 어떻게 찾아올지, 이어질지 모두모두 기대되고 기대된다.
신랑을 만난 것도, 신랑과 결혼한 것도, 신랑과 아이를 갖고 그것도 셋이나 낳고 키우는 것도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우울증으로 힘들어 하고 있는 내게 정신과 선생님이 질문하셨다.
어떻게 신랑분과 결혼을 결심하게 되신거에요?
- 신앙 때문이었죠. 하나님이 이 사람과의 결혼을 축복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렇다면 절대 흔들릴 일이 없을 것 같은데요.
- 그렇겠죠. 제가 믿음이 떨어져 있나봐요.  

팩폭이 날라왔다.

주님께는 모든 것을 순종하고 헌신해도,
신랑에게는 절대 아무것도 순종하지않고 헌신하지 않을거야.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이긴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사랑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면서 두려움을 몰고 오고 있었다.

우리 가정의 시작이 되었던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쫓나니”가 다시 살아 움직여야 할 때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는 우리 귀염둥이 딸들, 그리고 아와세 식구들, 아와세의 잃어버린 한 영혼을 위한 기도는 터져나온다.
그런데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고, 품어야 할 신랑에 대해서는 “이번엔 내가 먼저 절대 미안하다고 안하고, 풀지 않을거야. 넌 정말 이상해. 사랑 할 수 없어’라고 거부하고 있다.

아마도, 이번 선교의 가장 큰 숙제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아와세와 역사를 훑어보고, 내 인생의 간증을 정리하면서 기승전 신랑 욕으로 마무리한다.
디테일한 욕은 생략하겠다.

감사로 활성화된 뇌 회로를 죽이고 싶지 않다.

이렇게 또 묻고, 그냥 사랑하는 거죠.. 그렇게 살아가야하는 거죠.


오늘의 일기 끝